Wednesday, March 21, 2007

Korean comfort women during Korea War

See also comfot women during Korean War comfirmed





Bruce Cumings: There was a relatively seamless transition in terms of the American military replacing the Japanese military and so no one had an interest in probing into stories of the more than 100,000 Korean women who were dragooned into sexual slavery by the Japanese army. Really some of the former comfort women feeling themselves completely ruined and unable to return to their families became prostitutes for the American military after world war two. It was such a degraded situation under the American occupation in the Korean war that a friend of mine who served in the Korean war said on Friday night they would bring in a half ton truck full of 150 women and they would be in a movie house having sex. These undoubtedly included women who were comfort women for the Japanese armyKorean Sharing House
Transcript
by Judith Kampfner/March 21, 2007/New York Public Radio


According to OhmyNews(2002-02-26)* , there were comfort stations during Korean war exactly like comfort stations under Japanese rule.
A professor claims that the Korean military set up the brothels, runs the brothels, transported the women.
The difference, ohmynews says, is that Japanese comfort station system partake of "coercion" and it was a part of national mobilization.

The first photo is Japanese newspaper article that reported the Korean professor's research.
The second photo's caption reads,"Korean and the US army arrested two military nurses. At the time, a part of North Korean women were raped and forced to be prostitute.
The third photo's captoin reads......the US military officers seemed to transfer the part of Korean female students to the south for the "special purpose".
The fourth photo reads, the female guerrilla captured alive; the part of them were suspected to be mobilized as a comfort woman.
(correct me if my translation is wrong.)
From the interview with the women, it was made clear that there were cases where Korean women were raped and made prostitutes by military officers.
In October 1947 before the US military abolished the official system of prositutute, the number of "official prostitutes" were 2124.
In October 1948, the number of prositutes had increased as much as 50000 or more .
After Korean War, the number of prositutes was more than 300000.


There are some factual mistakes in what this professor is saying.
In case of comfort station under Japanese rule, Japanese military didn't run the brothels;private owners did, and the military and the police regulated it.
And again, as is often the case with Korean people , she mistook Teshintai for comfort station. Teshinta/Woman's Brigades were the asscociation into which the women were mobilized to work at factories.

I would say the difference is that Japanese military did not run the brothels and in cases where women were about to be abducted , the brothel owner didn't keep the rule, there are records that Japanese police arrested such pimps and reuglated the brothel owners.

I now seem to understand why some Koreans and some pro-Korean people, in particular some Korean Americans and some pro-Korean Americans in Korea want to say, mistakenly, despite the fact there is no backed up evidence , that Japanese military systematically abducted the women. If there is no such a fact,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comfort station during Korean War and the comfort station under Japanese rule, and they have to face the ugly reality of their own country and host country-----It might be that the Korean government responsibility is higher in that the military directly run the brothels and she didn't regulated pimps and brothels. Then they can not blame Japan anymore.---I might be wrong, I hope I am wrong.

via 世の中をなま暖かく見守るブログ
Here is a report on 東亜日報 September 14th 1961. Seoul city started the registration of comfort women for the UN soldiers.☆大韓ニダの介の韓国研究~韓国企業で働いた経験を持つ著者の嫌韓批判&反日批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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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특수위안대'는 사실상의 공창
[창간 2주년 기념 발굴특종]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했다 ②
김당(dangk) 기자


기자가 충남 논산의 육군 제2훈련소에 입소한 1980년 당시까지만 해도 논산훈련소 담장을 넘으면 이른바 '담요부대'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훈련병이었던 기자가 '담요부대'를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훈련소 조교나 기간병들은 자신들이 '담요부대'와 조우해 '격전'을 치른 '무용담'을 곧잘 얘기하곤 했다.

'담요부대'는 훈련소 담장 밖에서 담요 한 장을 '무기' 삼아 훈련병들을 상대하는 창녀들의 속칭. 이런 이동식 사창 형태의 담요 부대원 이야기는 미담이나 신화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군이 직접 위안부대를 설치해 운용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韓国軍 '特殊慰安台'は事実上の公娼
[創刊 2周年記念発掘特種] 韓国軍も '慰安婦' 運用した ②
金当たり(dangk) 記者


記者が忠南論山の陸軍第2訓練所に入所した 1980年当時までにしても論山訓練所垣根を越せばいわゆる '毛布部隊'にあえた.当時訓練兵だった記者が '毛布部隊'を直接目撃したことではないが訓練所助教や期間病たちは自分たちが '毛布部隊'と遭遇して '激戦'を行った '武勇談'をよく話したりした.

'毛布部隊'は訓練所垣根の外で毛布一枚を '武器' して訓練兵たちを相対する娼婦たちの俗称.こんな移動式私娼形態の毛布部隊員話は美談や神話のように聞こえたりした.しかし軍が直接慰安部隊を設置して運用したら問題が変わる.

지난 2월22일 <오마이뉴스>에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했다'는 발굴기사의 첫 회분이 보도된 이후 독자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군의 어두운 치부를 공개하고 반성하자는 것. 둘째, 구(舊) 일본군 위안부(慰安婦) 제도와는 다른 공창(公娼)이므로 불법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공창이건 사창이건 군이 전시(戰時)에 사기진작을 위해 위안부를 이용한 것이 뭐가 잘못이냐는 것이다. 이 2회분 기사는 주로 그 두 번째 반응과 직결된 답변을 담고 있다.

이 발굴기획 기사의 첫 회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군이 1951년 무렵부터 1954년까지 '특수위안대'라는 이름으로 고정식 혹은 이동식 위안부 제도를 도입해 운용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사실은 육군본부가 1956년에 편찬한 공식기록인 <후방전사(後方戰史)>(인사편)와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뒷받침된다.

<후방전사>에 실린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는 1952년도에 4개 소대로 편성된 위안대 89명이 연간 20만4560명의 병력을 '위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안부 1명이 하루 평균 6∼7명의 장병을 위안한 것이다. 또 채명신·차규헌·김희오 등 예비역 장군들도 한국전쟁 기간에 경험한 위안부 제도에 대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군부의 치부이지만 사실이다"고 증언하고 있다.

去る 2月22日oh my newsに '韓国軍も慰安婦運用した'と言う発掘記事の初回分が報道された以後独自の反応は大きく三種類で分類することができる.

第一,軍医暗い恥部を公開して反省しようということ.第二,旧(旧) 日本軍隊慰安婦(慰安婦) 制度とは違う公娼(公娼)なので不法ではないということ.そして終わりは公娼でも私娼でも軍が展示(戦時)に士気高揚のために慰安婦を利用したのが何が過ちかと言うのだ.この 2回分記事は主にその二番目反応と直結された返事を盛っている.

この発掘企画記事の初回分でよく見たように,韓国軍が 1951年頃から 1954年まで '特殊慰安台'という名前で固定式あるいは移動式慰安婦制度を取り入れて運用したのは否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歴史的事実だ.そんな事実は陸軍本部が 1956年に編纂した公式記録である後方戦死(後方戦史)(あいさつの方)と目撃者たちの証言に裏付される.

後方戦死に積まれた '特殊慰安台実績統計表'は 1952年度に 4ヶ牛どおり編成された慰安台 89人が年間 20万4560人の兵力を '慰安'したと記録している.慰安婦 1人が一日平均 6〜7人の将兵を慰安したのだ.またチェ名臣·チァギュホン·ギムフィオなど予備役将軍たちも朝鮮戦争期間に経験した慰安婦制度に対して "現わしたくない恥ずかしい軍部の恥部だが事実だ"と証言している.

물론 한국군 위안부 제도는 구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를 흉내낸 흔적에도 불구하고 두 제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국군 위안부는 위안부 동원방식이나 규모 등에서도 구 일본군 종군위안부와 비교가 안되지만, 무엇보다도 후자는 강제성을 띠고 있는 국가 동원체제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그 같은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위안대는 설치 동기나 운영 방식 면에서 일본군 종군위안부 제도를 흉내내 비슷한 모습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위안소 앞에서 줄을 지어 위안부를 기다리는 군인들과 전투력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하는 군의관의 모습 등은 일본군 종군위안소의 풍경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또 군표(일본군) 대신에 티켓(한국군) 같은 대가가 지불된 거래형식으로 운용된 점도 외형상으로 비슷한 모양새이다. 일본 우익은 이를 내세워 군 위안소 제도를 일종의 공창제와 같은 것으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군표는 일본의 주요 은행들이 언제든지 돈으로 교환해주는 일종의 '유가증권'이었다. 또 공창제가 국가가 여성의 성을 통제한 경우라면 위안소의 경우는 전시라는 상황에서 국가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군이 관리·운영의 주체라는 점에서 피해 여성들에 대한 인권유린은 더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もちろん韓国軍慰安婦制度は句日本軍 '従軍慰安婦' 制度を真似った跡にもかかわらず二つの制度は本質的に違う.韓国軍慰安婦は慰安婦動員方式や規模などでも句日本軍従軍慰安婦と比較にならないが,なによりも後者は強制性を帯びている国家動員体制の一環で施行されたという点が違う.

韓国軍 '特殊慰安台'は事実上の公娼

ところで注目する事実は当時国軍が設置して運営したこの '特殊慰安台',すなわち固定式慰安所の性格が事実上の公娼だったという点だ.言わば軍医公式記録には "休戦によってこのような施設の設置目的が解消されるに至って公娼廃止の潮流に順命(順命)して檀紀 4287年 3月これを一斉に閉鎖した"(後方戦死 148〜149ページ)つらくてある.余分の自らが '特殊慰安台'を公娼と認めているのだ.

短期(檀紀)を西紀(西紀)に換算すれば,慰安所を '一斉に閉鎖'一時点は 1954年 3月だ.ところで 1947年 11月11日米軍政庁が公布した公娼廃止領(法律第7号)の発效した時点は 1948年 2月からだ.明確な記録はないが慰安所設置時点は 1951年に推定される.したがって郡は公娼廃止領江戸かかわらず 1951年から 1954年まで約 3年間不法で公娼を設置·運営した犯法行為をほしいままにしたのだ.

結局軍が '公娼廃止の潮流に順命して慰安所を閉鎖した'と言う記録はふと見れば事実のようだが実際では自分の犯法行為を隠蔽するために事実を巧みに歪曲したのだ.軍は政府の公娼廃止領にもかかわらず事実上の公娼を 3年間も不法で運営したけれども '公娼廃止の潮流に順命して閉鎖'したことのように記録しているからだ.

それなら朝鮮戦争当時余分の慰安所を設置·運営する犯法行為の主体は誰だろう.これに対してはまだ明確な記録や証言を捜すことができない.ただ韓国軍の '慰安台' 運用事実を初めて申し立てたギムグィオック博士(慶南大北朝鮮専門大学院ビジティングプロフェッサー)は後方戦死と予備役将軍たちの回顧録そして関連者の証言などを土台でこんなに主張する.


"'特殊慰安台',すなわち余分の慰安所は陸軍によって設置されたのは間違いない事実だ.当時韓国軍の作戦体系上余分の慰安台の設置及び管理問題に対しての上では国連軍の最終承認の下に運営されたことに推定されて,下では特殊慰安台部隊長の責任の下に総括されたことと見える."

유엔군의 최종 승인 하에 운영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1950년 7월 한국 정부가 육·해·공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위임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후방전사>도 밝히고 있듯이, 위안소 운영은 전선이 아닌 후방에 국한되어 있었다. 또 위안대 설치는 작전지휘권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유엔군의 최종 승인하에 운영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당시 국방부와 육군의 수뇌부는 이와 같은 불법행위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국방부에 합동참모회의가 설치된 시점은 '특수위안대'를 폐쇄하기 불과 한 달 전인 1954년 2월이므로 합참은 위안부 설치·운영의 계선 상에서 제외된다)

国連軍の最終承認の下に運営されたはずだという推定は 1950年 7月韓国政府が六·日·空軍の作戦指揮圏を国連軍総司令官に委任したことに根拠を置いている.しかし後方戦死も明らかにしているように,慰安所運営は電線ではない後方に限っていた.また慰安台のさばる作戦指揮圏の範疇に含まれないから国連軍の最終スングインハに運営されたはずだという推定は説得力が劣ったように見える.

しかし当時国防省と陸軍の首脳部はこのような不法行為の責任で自由ではないようだ(国防省に合同参謀会議の設置された時点は '特殊慰安台'を閉鎖することわずか一月前の 1954年 2月なので合同参謀は慰安婦設置·運営の繋船上から除かれる

慰安所を設置·運営した時点の歴代陸軍参謀総長は △5代チョン・イルグォン中将(1950.6〜1951.6)△6台李鍾賛中将(1951.6〜1952.7)△7台バックソンヨブ大将(1952.7〜1954.2)△8代チョン・イルグォン大将(1954.2〜1956.6)などだ.1951年に推定される設置時点で見ればチョン・イルグォン·李鍾賛二人の総長の一人だ.

1948年創軍当時の軍首脳部人脈が大部分日本軍·関東軍出身だったが,二人の総長皆日本陸士出身だ.朝鮮戦争時代に慰安婦制度を目撃したギムフィオ将軍(予備役陸軍所長)の "過去日本軍隊従軍経験がある一部連帯幹部たちが部下詐欺高揚のための発想から始まったこと"という証言はそれに対する手がかりを提供する.ギムグィオック博士も "軍隊慰安婦創設の企画者が確かに日本軍や関東軍出身者とか彼に影響を受けた者に推正することができる"と明らかにする.

余分の関係者たちは李鍾賛総長が 1952年釜山政治波動の時軍医政治的中立を力説した '本当に軍人の象徴'で見なされて来た点に映して一応チョン・イルグォン総長の方に余分の慰安台設置·運営可能性の比重を大きく置く.一方当時国防省長官の中では第2代シン・ソンモ長官(1949.3〜1951.5)課題3台イギブング長官(1951.5〜1952.3)重い人が設置を承認したことに推定される


한국군 위안부, 이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과연 군 위안부, 이들은 누구일까. 그런데 기존의 자료 어디에도 위안부 정체에 대한 언급은 없다. 김귀옥 박사에 따르면, 다만 몇몇 문헌에서는 적지 않은 귀환 일제 군 위안부들이 한국전쟁 당시 성(性) 매매업으로 흘러들어 갔으리라는 경험적 진술에 따른 추정만 있을 뿐이다. 1996년부터 속초에서 월남민 연구를 하면서부터 처음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련자들을 인터뷰해온 김 박사의 추정에 따르면 위안부의 정체와 유형은 몇 가지로 나뉜다.

김 박사가 우선 주목한 것은, 비록 소규모이긴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위안부' 모집 형태를 쏙 빼 닮은 형태의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북파공작원과 위안부의 '불행한 만남'이었다. 익명을 요청한 북파공작원 출신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 박사가 밝힌 이 첫 번째 유형은 납치와 강간에 의해 '위안부'가 된 사례이다.

문아무개(69) 씨는 1951년 5월경 원산 앞 바다에 있는 섬에서 다른 여맹원 3명과 함께 모여 있다가 당시 원산 앞 바다의 여도에서 첩보공작활동을 하던 북파공작원들에게 납치당했다가 그중 한 명(이아무개 하사관)에게 겁탈 당한 후에 강제로 '위안부'가 된 케이스.

문 씨는 결국 1953년 7월 정전이 될 때까지 여도에서 이하사관의 아이를 낳고 같이 살았다. 함께 납치된 다른 여성들도 낮에는 군인들의 밥과 빨래를 하고 밤에는 '위안부'가 되어야 했다. 이런 일은 인근 양도에서도 있었다.

김 박사에 따르면 문씨를 납치한 북파공작원 최아무개 씨는 "부대 내에 위안부를 데리고 있는 것은 잘못이지만, '우리'가 '일본군'과는 다르지 않느냐, 우리와는 정이 통하지 않느냐며 납치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설명을 흐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본대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취사생활을 해야 했던 북파공작원 부대원들이 '위안부'를 고용한 케이스. 김박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들의 정체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韓国軍慰安婦,これらはだれか?

それなら果して軍隊慰安婦,これらは誰だろう.ところで既存の資料どこにも慰安婦正体に対する言及はない.ギムグィオック博士によれば,ただいくつかの文献では少なくない帰還日製余分の慰安婦たちが朝鮮戦争当時性(性) 売買業で流れて行ったという経験的陳述による推定だけあるだけだ.1996年から束草で越南民研究をしてから初めて韓国軍慰安婦問題に対して関心を持って関連者たちをインタビューして来た金博士の推定によれば慰安婦の正体と類型は何種類で分けられる.

金博士がまず注目したことは,たとえ小規模ではあるが日本ミリタリズムの '慰安婦' 募集形態を瓜二つな形態の慰安婦が存在したという事実だ.それはちょうど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と慰安婦の '不幸な出会い'だった.匿名を要請した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出身人士とのインタビューを通じて金博士が明らかにしたこの一番目類型は拉致と強姦によって '慰安婦'になった事例だ.

ムンアムゲ(69) さんは 1951年 5月頃原産前海にある島で他の女性同盟院 3人と一緒に集まっている途中当時原産前海の女道で諜報工作活動をした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ドルに拉致されてからなかでも一人(李何某下士官)に劫奪あった後強制で '慰安婦'になったケース.

門さんは結局 1953年 7月停電になるまで女道で以下士官の子供を生んで一緒に暮した.一緒に拉致された他の女性たちも昼には軍人たちのご飯と洗濯をして夜には '慰安婦'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んな事は隣近譲り渡しでもあった.

金博士によればムンさんを拉致した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催何某さんは "部隊内に慰安婦を連れていることは過ちだが,'私たち'が '日本軍'とは違わないか,私たちとは血が通わアンヌニャであり拉致した慰安婦問題に対する説明を濁ごした"と言うのだ.また他の類型は本隊と落ちて独立的に炊事生活を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部隊員たちが '慰安婦'を雇ったケース.金博士は自分の論文でこれらの正体に対してこんなに明らかにしている.

"북파공작원 1은 군 위안부들은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여성들이었다고 일축했다. 북파공작원 2도 이에 동의했다. 그런데 북파공작원 1이나 2가 있던 원산 앞 섬에 위안부로 온 여성은 '그 섬에 와 군인들 밥하고 빨래해주면 한 밑천 장만할 수 있다'는 얘기에 속아왔다고 공작원 2는 엇갈리는 증언을 했다. 전쟁 미망인으로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일종의 '군 노무자'가 된 것은 그의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군 위안부가 된 것은 거절할 수 없는 강제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더욱이 납치된 여성들에게 선택권이나 거절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 1は余分の慰安婦たちは職業的に身を売る女性たちだったと一蹴した.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 2度ここに同意した.ところで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 1や 2行っていた原産先に進むに慰安婦で全女性は 'その島へ来て郡だって飯をたいて洗濯してくれてほしい元金新調することができる'と言う話にだまされて来たと工作員 2は行き違う証言を言った.戦争未亡人として生活苦に苦しみながら一種の 'だね労務者'になったことは彼の選択だったと言っても軍隊慰安婦になったことは断ることができない強制的な状況で起こった事だった.なおかつ拉致された女性たちに選択権や拒絶圏は与えられなかった."


1950년 당시 의과대학생이었던 이아무개(73) 씨는 납치 또는 강요에 의해 군 위안부가 될 뻔했던 또 다른 여성의 사례이다. 6·25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인민군에게 협력한 것 때문에 국군에게 체포된 이 씨는 다른 여자 의대생 3명과 함께 인계된 부대의 장교 4명에게 '배정'되었다. 이 씨는 다행히 자신을 불쌍히 여긴 한 장교의 도움으로 풀려났으나 다른 3명은 그때 이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납치 또는 강요에 의해 사실상의 군 '위안부' 노릇을 한 사례는 많지 않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예비역 장군들의 회고록에도 일부 등장한다. 1951년 8월 육군 소위(종합31기)로 임관해 1984년 8월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김희오 장군의 회고록 <인간의 향기>(2000년)가 그것이다.

1951년 8월 임관하자마자 동부전선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에 배속되어 향로봉 전투에 참가했던 김희오 장군이 당시에 이끈 소대원들은 대부분 수도사단이 함경도에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흥남 철수작전시에 대동(帶同) 월남한 주로 함흥-원산지역 고교 출신의 현지 입대 청소년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국군은 남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부 여고생들도 '특수 목적'으로 대동 월남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0年当時医科大学生だった李何某(73) さんは拉致または強要によって軍隊慰安婦になる所だったまた他の女性の事例だ.6·25 当時ソウルに残ってから人民軍に協力したことから国軍に逮捕したこのさんは他の女医大生 3人と一緒に引き継ぎされた部隊の将校 4人に '割当'になった.このさんは幸いに自分を可愛想にここは一将校の助けで釈放されたが他の 3人はあの時以後二度と見られなかった.

拉致または強要によって事実上の軍 '慰安婦' 役を一事例は多くないが朝鮮戦争に参戦した予備役将軍たちの回顧録にも一部登場する.1951年 8月陸軍いわゆる(総合31期)に任官して 1984年 8月陸軍所長に予編したギムフィオ将軍の回顧録人間の香り(2000年)がそれだ.

1951年 8月任官するやいなや東部戦線首都社団(師団長ソングヨチァン)に倍速されて香炉峰戦闘に参加したギムフィオ将軍が当時に導いた小隊院たちは大部分首都社団が咸境道に進撃してから中共君の介入で興南撤収作戦の時にデ洞(帯同) 越南した主に咸興-原産地域高校出身の現地入隊青少年たちだった.ところで当時国軍は男子学生たちだけではなく一部女子高生たちも '特殊目的'で大同越南したことと見える.

북한 여성 납치해 '위안부'로 이용하기도

김희오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후 전선을 빠져 나온 수도사단은 1951년 11월~1952년 4월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 동원되어 당시 남원에 위치한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예하 주력부대로 8사단 등과 합동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김 장군은 소대장 시절 토벌작전 도중에 지리산의 전투지역 지휘소에서 목격한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대장 천막 속에서 분명코 전투복을 착용한 소녀 한 명이 나와서 기지개를 펴고 체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임하사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보니 대대장께서 북진 당시 함흥 여고생을 애첩으로 동반, 철수하여 작전기간 중 순천에 모셨다가 최근 OP로 동반하였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대대장실에서 세숫물 대령 지시가 있었는지 당번병이 반합으로 물을 데워 가져가고 있었다."

北朝鮮女性拉致して '慰安婦'で利用したり

ギムフィオ将軍の回顧録によれば,以後電線をすり抜けて来た首都社団は 1951年 11月~1952年 4月智異山工費討伐作戦に動員されて当時南原に位したバックソンヨブ将軍が導く西南誌で戦闘司令部隷下主力部隊で 8社団などと合同で作戦に参加した.金将軍は小将時代討伐作戦途中に智異山の戦闘地域指揮所で目撃した光景をこんなに記録している.


"大隊長天幕の中で分明して戦闘服を着した少女一人が出て伸びを伸ばして体操を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先任下賜にどうする英文なのか問って見たら大隊長が北進当時咸興女子高生を愛妾で連れ,撤収して作戦期間の中でスンチョンに仕えてから最近 OPで伴ったというのだった.数日後代代丈室で手水大領指示があったのか当番病が飯ごうで水を暖めて持って行っていた."

김 장군은 당시 행군할 때 솜이불 침구와 여자 화장품 상자가 전투 소대원의 대열 속에서 배낭 위에 덤으로 얹혀 가는 슬픈 현실을 목도하고 분노했지만, 점령지에서의 강간과 납치는 사실 비일비재한 상황이었다. '군 위안부'가 될 뻔했던 앞서의 이아무개 씨와 국군 출신으로 인민군 해방전사가 된 비전향장기수 양정호 씨나 다른 국군 출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유엔군과 국군은 1950년 10월∼12월 북한 지역을 점령한 동안 상당수의 민간 여성들을 겁탈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김귀옥 박사는 이렇게 추정한다.


"특히 좌익 부역혐의가 있는 젊은 여성에 대한 강간은 실제 및 가상적에 대한 통제 및 순치 방식의 하나였다. 비공식적으로 1950년에도 군 위안부나 위안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군의 풍기 문란을 우려하여 1951년 이후 군 위안대를 공식 창설했고 일선 군부대에서도 비정기적으로 군 위안부를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처럼 민간인 강간과 납치에 의해 이미 '위안부' 생활을 경험한 여성들의 상당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사창으로 흘러들어 갔다가 다시 '군 위안부'라는 공창으로 편입되는 악순환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예비역 장군들이 기억하는 또 다른 유형은 사창가에서 사들여온 가난한 여성들에 관한 것이다. 이런 여성들에 대한 '위안'의 대가는 사단 휼병부나 연대 인사처에서 지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는 분명한 사실은 전시 하에 특별위안대를 이용하는 것 이외에도 전방의 부대들은 필요시 군 위안부를 채용할 수 있었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귀옥 박사는 군 당국이 밝힌 위안대 폐지 시점에 대해서도 다음과 문제를 제기한다.


"군부대가 공식 운영했던 공창으로서의 위안대는 1954년 3월에 소멸했는지 모르지만, 북파공작원의 증언에서는 사실상의 위안대가 존재하고 있다. 그 위안대는 사창의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군부대가 공식적인 '후생비'의 명목으로 지출하고 북파공작원에 대한 포상의 형태로 존재해왔던 것 같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위안부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김귀옥 박사는 "현재로선 한국전쟁 당시 공식·비공식적 위안부 규모를 알 길이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다만 전쟁 직전 사창의 규모를 능가할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고 말한다.

金将軍は当時行軍する時綿布団寝具と女化粧品箱が戦闘小隊院の貸し下げをの中でリュックサックの上にお負けで載せられて行く悲しい現実を木刀して怒ったが,占領地での強姦と拉致は実はたくさんある状況だった.'軍隊慰安婦'になる所だった前の李何某さんと国軍出身で人民軍解放戦死になった非転向長期囚量定号さんや他の国軍出身者たちの証言によれば,国連軍と国軍は 1950年 10月〜12月北朝鮮地域を占領したうちにかなり多い数の民間女性たちを劫奪したことと見える.これに対してギムグィオック博士はこんなに推正する.


"特に左翼賦役疑いがいる若い女性に対する強姦は実際及び仮想的に対する統制及び悉歯方式の一つだった.非公式的に 1950年にも軍隊慰安婦や慰安台は存在したことと見えて,むしろ軍医風紀紊乱を憂慮して 1951年以後余分の慰安台を公式創設したし一線軍部隊でも非定期的に軍隊慰安婦を動員したことと見える."


そしてこのように民間である強姦と拉致によってもう '慰安婦' 生活を経験した女性たちのかなり多い数は自暴自棄の心情で私娼で流れて行ってから再び '軍隊慰安婦'という公娼に編入される悪循環を繰り返えしたように見える.

予備役将軍たちが憶えるまた他の類型は売春町から仕こんで来た貧しい女性たちに関するのだ.こんな女性たちに対する '慰安'の対価は買うという恤兵部も開くんだってあいさつ先で出費したというのだ.しかしこれらの証言でも現われる明らかな事実は展示の下に特別慰安台を利用すること以外にも前方の部隊たちは必要の時軍隊慰安婦を採用することができたならことと見える.それでギムグィオック博士は余分の政府が明らかにした慰安台廃止時点に対しても次と問題を申し立てる.


"軍部隊が公式運営した公娼としての慰安台は 1954年 3月に消滅したのか分からないが,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の証言では事実上の慰安台が存在している.その慰安台は私娼の形式で存在するが軍部隊が公式的な '厚生費'の名目で出費してブックパゴングザックワンに対する褒賞の形態で存在して来たようだ."


それなら朝鮮戦争当時韓国軍慰安婦の規模はどの位だったろうか.ギムグィオック博士は "現在としては朝鮮戦争当時公式·非公式的慰安婦規模が分かるあてがない"と前提しながらも "ただ戦争直前私娼の規模をしのぐと推正するだけだ"と言う.

그런데 관련 기록에 따르면, 1947년 11월 미 군정청이 공창폐지령을 발표하기 직전인 1947년 10월20일 현재 공창의 규모는 2124명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공창폐지령이 발효된 후인 1948년 10월말이 되면 사창은 5만여 명으로 급증한다. 또한 한국전쟁이 끝난 후 성 매매를 하는 여성은 30여만 명으로 늘어난다. 공창이 폐지되면서 사창은 급증한 것이다.

일부 여성학자들은 이처럼 성 매매 여성이 늘어난 데는 생활고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 수천 명의 위안부들이 해방 이후 고국에 들어와 생계를 잇지 못해 창기로 전락'했던 데도 원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앞에서 예로 든 경우처럼, 민간 여성들이 납치와 강제의 형태로 위안부가 되었던 사례도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김 박사의 지적이다.

"만일 한 발 양보하여 군 위안부가 과거 공·사창 출신이었다고 하더라도, 한국전쟁 전전(戰前) 5만여 명의 공·사창이 전후 30여만 명으로 늘어난 문제와 관련지어 볼 때 설명되지 않는다. 군 위안부가 어떻게 동원되었으며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가에 대해 확실히 규명할 수는 없더라도 아직도 한국전쟁 당시 군부 책임을 맡았던 자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정부 당국은 이 문제에 대해 진상을 규명할 책임이 있다"

ところで関連記録によれば,1947年 11月米軍政庁が公娼廃止領を発表する直前の 1947年 10月20日現在公娼の規模は 2124人だった.しかし翌年 2月公娼廃止領が発效した後の 1948年 10月末になると私娼は 5万名余で急増する.また朝鮮戦争が終わった後性売買をする女性は 30余万人で増える.公娼が廃止されながら私娼は急増したのだ.

一部女性学者たちはこのように性売買女性の増えたことは生活苦だけではなく '日製末期数千名医慰安婦たちが解放以後故国に入って来て生計を引き継ぐことができなくて娼妓と転落'したところも原因があったことに推定される.しかし他の一方では前で例であげた場合のように,民間女性たちが拉致と強制の形態で慰安婦になった事例もあったのだ.次は金博士の指摘だ.

"万である一足譲歩して軍隊慰安婦が過去球·私娼出身だったと言っても,朝鮮戦争戦前(戦前) 5万名余の球·私娼が前後 30余万人で増えた問題とかかって見る時説明されない.軍隊慰安婦がどんなに動員されたしその規模はどのゾングドヨッヌンがに対して確かに糾明することはできないとしてもまだ朝鮮戦争当時軍部責任を引き受けた者等が生存しているので政府政府はこの問題に対して真相を糾明する責任がある"2002-02-26 OhmyNews





▲한국군의 한국전쟁 기간 '위안부' 운용 사실을 보도한 일본 아사히신문 2월24일자 기사. ▲韓国軍の朝鮮戦争期間 '慰安婦' 運用事実を報道した日本朝日新聞 2月24日付け記事.


▲ 한국전쟁 기간에 한국군과 미군이 체포한 인민군 간호원 2명. 당시 체포된 북한 여성의 일부는 강간당하거나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

▲朝鮮戦争期間に韓国軍と米軍が逮捕した人民軍看護婦 2人.当時逮捕した北朝鮮女性の一部はレイプされるとか強制で '慰安婦'になった.


▲ 한국전쟁 직전에 당시 38선 이남인 옹진반도를 방문해 여학생들의 영접을 받은 유엔 현장시찰단. 1950년 10월∼12월 북한 지역을 점령한 미군과 한국군의 일부 장교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면서 일부 여학생들을 '특수목적'으로 대동 월남한 것으로 드러났다.

▲朝鮮戦争直前に当時 38線以南である壅津半島を訪問して女学生たちの迎接を受けたUN現場視察団.1950年 10月〜12月北朝鮮地域を占領した米軍と韓国軍の一部将校たちは中共君の介入で後退しながら一部女学生たちを '特殊目的'で大同越南したことで現われた.

▲ 한국전쟁 기간 후방에서 진행된 '쥐잡기 작전'(공비토벌작전)에서 생포된 여성 게릴라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군 '위안부'로 동원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朝鮮戦争期間後方で進行された 'ズィザブギ作戦'(工費討伐作戦)で生け捕りされた女性ゲリラ.これらの中一部は軍 '慰安婦'で動員されたはずだという疑惑が申し立てられている.

ohynews 魚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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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軍相對慰安婦13日부터登錄實施



 서울시경에서는 시사회국에「유엔군상대 위안부성병관리사업계」계획에따라 三일부터 유엔군상대 위안부의 등록을 관하 一선서에 전달해서 실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등록대상은▲법적혼인 관계없이 단一인의 외국인과 동거하고 있는 여성▲유엔군상대 위안부 등이라고 한다



【翻訳】

UN軍相対慰安婦13日から登録実施



 ソウル市警では市社会局に「国連軍相手慰安婦性病管理士業界」計画によって三日から国連軍相手慰安婦の登録を官下一線署に伝達して実施している。

 ところで今度の登録対象は▲法的婚姻関係がなくただ一人の外国人と同居している女性▲国連軍相手慰安婦などだと言う
http://bbs.enjoykorea.jp/tbbs/read.php?board_id=teconomy&nid=2840873

韓国戦争中にも軍慰安婦存在」韓国教授が主張

日本軍の慰安婦制度を真似た慰安婦制度が、韓国戦争当時、韓国軍にもあったという主張が提起されたと朝日新聞が24日報道した。

韓国の慶南(キョンナム)大学の客員教授の金貴玉(キム・キオック、40)氏は、23日京都の立命館大学で開かれた国際シンポジウムでこのように発表したと同新聞は伝えた。

金教授は「1996年以後、5年間『直接慰安所を利用したことがある』、『軍にら致され、慰安婦になった』など男女8人の証言を聴取した」と明らかにした。

金教授はまた「韓国陸軍本部が1956年編さんした公文書『後方戦史』に『固定式慰安所-特殊慰安隊』と記録された部分を発見し、これには4カ所で89人の慰安婦が1952年に限って20万4560回の慰安活動をしたという統計資料が添付されていた」と同新聞は付け加えた。

一方、国防軍事編纂研究所の関係者は『当時、軍は売春婦と合意の下で場所を提供した。また慰安行為の対価は部隊運営費から支給されたと聞いている」/東京=呉デ泳(オ・デヨン)特派員 /2002.02.24 19:29:41/中央日報